‘
젠더폭력 근절’ 외친 정부
성폭 피해자 예산 27억원 줄어
여가부 핵심 사업 인데도
‘돈줄’은 법무부가 쥐고 있어
기금 아닌 일반회계 이관해야
정부가 ‘젠더폭력’을 뿌리뽑고 젠더폭력 피해자 지원을 강화하겠다고 약속했으나 정작 내년도 성폭력 피해자 지원 예산은 27억원 넘게 삭감된 것으로 확인됐다. 여성가족부의 핵심 사업이지만 이 예산 전액이 법무부가 집행하는 범죄피해자보호기금(범피기금)에서 나오는 탓에 재원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어서다. 성폭력 피해자 지원 예산을 일반회계로 이관해 안정적으로 운영해야 한다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
현재 국회가 심사 중인 2018년 여가부 예산안은 8265억9500만원이다. 2017년 대비 652억7900만원(8.6%) 증액됐다. 그러나 정부 전체 예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0.18%에 불과하다. 다른 부처의 경우 국이나 과 단위에서 1조원이 넘는 예산을 집행한다는 사실은 정부 내에서 여가부의 위상이 어떤 수준인지를 보여준다. “이래서 성평등을 주도해나가겠느냐”고 자조적인 목소리도 들린다. 전체 예산 중 일반회계는 3344억4900만원이고, 기금은 4921억4600만원으로 기금 의존도가 높다.
본래 예산 규모가 작다보니 내년도 8.6% 인상 폭도 사실상 의미가 없다. 또 증가분의 내역을 들여다봐도 허수가 있다. 증액분의 절반 가까이가 국립청소년생태센터 등 청소년 수련시설 건립 사업, 치료재활센터 등 시설 건립 예산으로 책정돼있다. 특히 청소년 시설 건립사업은 ‘지역발전특별회계’라는 항목으로 책정돼있어 집행 권한이 여가부에 없고 해당 지역 시·도지사가 갖는다. 집행률도 낮아 문제다.
게다가 내년 예산안에서 주요 사업의 예산마저 삭감되는 일도 벌어졌다. 문재인 정부는 젠더폭력방지법, 국가행동계획 등을 수립해 여성 대상 범죄에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강조했기에 성폭력 피해자 지원 예산도 증액될 것으로 기대됐지만 올해보다 27억원 넘게 줄어든 262억2200만원으로 책정됐다.
성폭력 피해자 지원예산 증액은 여러 해 전부터 요구돼왔다. 여가부 위탁시설의 임금이 다른 부처에 비해 특히 낮은 편이지만 성폭력 피해지원 시설 종사자의 처우는 더욱 열악하기 때문이다. 대검찰청에 따르면 성폭력 범죄도 2013년 2만6919건, 2015년 3만1063건으로 증가 추세다. 성폭력 피해자 지원의 질 저하가 우려되는 상황에서 내년도 예산마저 줄어들면서 현장의 지원시설 관계자들은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성폭력 피해자 지원 예산이 줄어든 근본적 원인은 예산 편성 권한이 여가부가 아닌 법무부에 있기 때문이다. 여가부는 법무부가 책정한 예산을 집행하고 평가받는다. 정부 예산은 일반회계와 기금으로 구분되는데, 성폭력 피해자 지원은 범피기금으로 충당된다. 범피기금은 정부의 공식 예산이 아니라 형사처벌을 받은 이들이 내는 벌금으로 마련된다. 여가부가 예산 편성의 자율권이 없는 상태에서 집행 실적에 따라 저조한 평가점수를 받으면서 예산이 감액된 것이다. 이양수 자유한국당 의원은 국회 여성가족위원회 회의에서 “패널티 부과를 위해 성폭력 피해자 예산을 감액해야 한다면 오히려 여가부의 기본경비를 감액하는 방안을 고려해야 한다”고 질타하기도 했다.
장기적으로 일반회계와 기금의 성격에 맞게 예산을 재편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남인순 국회 여성가족위원장은 “성폭력피해자 지원 사업의 사업 추진 부처(여가부)와 기금 관리 부처(법무부)가 서로 달라 사업 수요에 효율적으로 대처하고, 여가부 소관 유사 사업과의 일관된 추진에 어려움이 있어 여가부 일반회계로 이관해 편성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또 “양성평등기금 내 성폭력피해자 지원사업 또한 일반회계로 이관해 사업의 연계 추진이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편, 내년도 여가부 예산에 눈에 띄는 신규 사업도 있다. 디지털성범죄 예산 7억4000만원이 새롭게 편성됐다. 이는 피해자 지원 등에 쓰일 예정이다. 저소득가정 청소년 생리대 지원사업은 지난해 보건복지부 사업이었으나 올해 여가부로 이관됐다. 기존에 바우처 방식 대신 온라인 신청시스템을 구축한다. 이밖에 아르바이트 등을 하는 청소년을 보호하기 위한 청소년근로보호사업도 처음으로 정규 예산이 편성됐다. 그동안 공모사업으로 진행돼온 사업이다.
이밖에 국가성평등지수를 측정하는 분야별 성인지 예산의 관점에서 보면 취약 지점도 발견된다. 국가 총 예산은 7.1% 증가했고 성인지 예산은 16.2% 증가했지만 세부항목을 들여다보면 편차가 크게 나타난다. 국회 여성가족위원회 차인순 입법심의관은 “국가성평등지수에서 의사결정, 안전, 가족 분야가 낮게 나타나는데 내년도 성인지 예산안에도 안전 분야는 1.5%, 가족 분야는 3.6% 증액돼 다른 분야 증가율보다 굉장히 낮다”면서 “성인지예산제의 효과성을 고려하기 위해 국가성평등지수 지표와 성인지 예산안 편성 간 연계를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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