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별화된 한국 사회의 현실에서 사회적 약자인 여성들은 남성들에 비해 위험한 상황이나 환경에 더 쉽게 노출될 수 있으며, 같은 위험에 노출된 경우에도 그 위험의 수위를 더욱 높게 인지하거나, 더 심각한 피해를 당할 수 있다.
여성의식 향상에 비례해 안전권 이슈도 부각돼
또한 현대사회에서는 전통적인 의미의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구분이 모호해지고 있다. 따라서 사적 영역, 곧 여성의 영역으로 인식돼왔던 일상생활이 점점 공적인 문제로 부각되고 있다. 먹을거리, 자녀의 안전한 양육 등의 문제는 더 이상 사적으로 처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점차 정치체제와 시장체제가 감당하고 해결해야 하는 중요한 정책 과제가 됐다. 이에 대한 안전을 도모함에 있어서도 사적인 대처가 아닌 공적인 대처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높아지고 있다.
여성 의식 향상에 따른 문화적 변동도 여성들의 안전과 위험 문제를 중요한 사회적 문제로 부각하고 있다. 과거와 달리 여성들이 가정 밖의 사회활동에 적극 참여하게 되면서 어두운 밤길에 대한 두려움이나 성폭력에 대한 위협 등 위험한 환경이나 상황에 노출되는 정도가 많아지고 있다. 또한 직장에서의 성희롱, 교통사고, 인위적 재난 등에 더 많이 노출되면서 여성들이 위험을 인식하는 수준 역시 높아지게 됐다. 여성들의 인권 및 권리의식의 향상 역시 과거에는 문제시되지 않던 상황이나 환경들까지도 여성들에게 ‘위험’으로 느껴지게 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성희롱 등의 문제가 가장 대표적일 것이다
여성들 “지하 주차장이나 으슥한 곳이 가장 두렵다”
도시 공간에서 여성의 생활환경과 관련된 전반적인 안전 상태에 대한 질문을 5점 척도로 하여 ‘전혀 그렇지 않다’(1점), ‘별로 그렇지 않다’(2점), ‘보통이다’(3점), ‘어느 정도 그렇다’(4점), ‘매우 그렇다’(5점)로 나누어 조사해 보았다. 그 결과, 여성 응답자의 경우 ‘지하 주차장이나 으슥한 곳에 혼자 있는 것이 두렵다’는 문항이 평균 3.97점을 받아 가장 높게 동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다음으로는 ‘평소 밤늦게 외출할 때 혼자 다니기 무섭다’(3.85점), ‘가로등 조명이 어두워서 심야에 다니기가 꺼려진다’(3.72점), ‘주차장의 주차 공간이 좁아 주차하기 힘들다’(3.24점) 순으로 응답자들의 동의가 높았다. 문항에 관한 여성들의 응답은 모두 3점(보통이다) 이상으로, 전반적으로 여성들이 남성들보다 생활환경의 안전 상태와 관련한 문제를 더 높게 인식하는 편이었다.
생필품의 유해성 물질에 대한 걱정의 경험은 남성보다 여성의 경우가 더 많아서 전체 여성의 79.6%(남성 60.0%)가 식품 안전에 대해 걱정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온라인상의 정보 유출 경험은 남성의 비율이 더 높았고, 대중교통수단 내에서의 성추행 경험은 여성과 남성의 차이가 크게 나타났다. 어린아이를 동반한 성인 남녀(남성 256명, 여성 635명)의 경우 대중교통수단 이용 시 어려움을 겪은 비율은 여성의 경우가 더 높았다.
다양한 기준의 문항 가운데 위험에 대한 남성과 여성의 주관적 인식의 차는 온라인상의 개인 정보 유출, 주차 공간, 자녀의 음란물 노출, 자녀의 유괴와 관련한 항목을 제외한 대부분의 항목에서 나타났으며, 통계적으로 유의한 차이를 보이는 모든 항목에서 여성이 위험을 느끼는 주관적 인식이 남성보다 높게 나타났다. 특히 ‘강도나, 성폭행 등의 위협을 당할 때 아무에게도 도움을 받지 못할까 두렵다’고 느끼는가에 대한 인식의 경우 ‘보통이다’를 3점으로 보았을 때, 남성의 평균은 2.8점으로 평균보다 낮았으나 여성은 3.8점으로 훨씬 더 신변의 안전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여성에게 안전한 생활환경을 조성하기 위한 정책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순위별로 조사하였고, 우선 실시돼야 한다고 생각하는 정책에 대한 남성과 여성의 인식 차를 살펴보았다.
1순위로 실천돼야 할 정책에 대한 응답 중 도시 공간과 관련된 정책에 대한 요구도(그림1)는 ‘범죄 발생이나 안전 사각지대를 고려한 거리·건축 및 도시 설계’가 13.8%, ‘도로와 건물 주변의 조명을 밝게 하는 것’이 7.8%, ‘여성과 아동의 안전을 고려한 도로 개선’이 4.8%, ‘여성의 주차 안전을 위한 여성 전용 주차장 설치’가 1.3%를 차지했다. 성범죄 등 여성의 폭력 피해를 막기 위한 정책에 대한 요구도는 ‘성희롱 및 성폭행 예방 프로그램의 보급 및 확산’이 23.6%, ‘인터넷상에서 여성의 사생활 보호를 위한 강력한 법적 조치 강구’가 5.2%의 응답률을 보였다. 식품 안전과 관련해서는 ‘먹을거리 사고 방지를 위한 정부의 지속적인 위생 관리 및 검역’에 15.7%가 응답했다. 마지막으로 정부의 적극적인 역할과 시민단체와의 협력에 대해서는 ‘정부의 적극적인 캠페인 시행’ 11.6%, ‘정부, 시민단체 협조’가 16.1%로 나타났다.
범죄 발생·안전 사각지대 고려한 도시 설계 요구 많아
우선 실천돼야 한다고 생각하는 정책(그림2)을 보면 전체 대비 응답자의 비율에서 여성보다 남성이 높게 나타난 항목은 여성 안전에 대한 정부와 시민단체 협조, 온라인상의 여성 사생활 보호장치, 범죄 발생을 고려한 도시 설계의 정책이며, 나머지 항목에서는 전체 사례 수 대비 여성 응답자의 비율이 남성보다 높았다. 성희롱 및 성폭행 예방 프로그램에 관련해서는 남성 응답자의 비율이 여성보다 높게 나타났다.
여성에 대한 폭력으로부터 안전한 삶은 여성들이 가정과 직장과 사회에서 제대로 역량을 발휘하고 인간답게 살기 위한 기본적인 조건이면서 인간으로서의 권리라고 할 수 있다. 여성에 대한 폭력은 성차별적이고 폭력적인 사회와 문화, 가부장적인 가족관계와 문화, 성차별적인 노동시장 등 사회구조적인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동해서 발생하고 있는 현상이다. 원인이 복잡한 만큼 몇 개의 정책이나 법의 변화만으로 없어질 수 없으며, 보다 체계적이고 장기적인 대책이 필요하다. 가해자에 대한 확실하고 적절한 처벌, 피해자의 인권보호와 지원, 가족 안에서의 평등과 인권, 민주적인 가족관계를 만들어갈 수 있는 대안들이 만들어져야 할 것이다.
지금과 같이 사건 발생 이후 대처하는 사후적 대책에서 사전적 예방체제로의 안전망 체제 틀 자체의 근본적인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특히 지방자치단체의 제한된 예산과 지역사회의 인적자원을 보다 체계적으로 투입해서 정책 효율성을 극대화해야 한다. 동시에 민간과 공공부문의 협력 네트워크 구축을 통해 공동체의 감시 능력을 강화하고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겠다. 이를 위해서는 제도와 시설 중심으로 돼 있는 기존의 정책에서 벗어나 지역사회의 인적자원과 네트워크를 활용하는 방향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
현재 여성가족부가 추진하고 있는 ‘아동여성보호 지역연대’는 이러한 지역사회의 안전망 확보를 위한 시도라고 볼 수 있다. 현재는 협의체로 구성돼 있으나 앞으로는 각 지역사회 내에서 아동과 여성의 안전을 보호하기 위해 실질적으로 가동할 수 있는 기구로 활성화되도록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는 것이 향후의 성패를 좌우하는 열쇠가 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지방자치단체별로 지역 연대의 업무를 담당할 전담 공무원을 지정해 배치할 필요가 있으며, 이 과정에서 행정안전부와 지방자치단체와의 협조는 필수다.
덧붙여 장기적으로는 여성에 대한 폭력 예방과 인권 및 여성들이 안전하게 살 수 있는 권리에 대한 내용이 공교육 과정은 물론 평생교육 기관의 교육과정에도 체계적이고 지속적으로 포함될 수 있도록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